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르겐 하버마스 (문단 편집) == 여담 == *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특이한 입모양이 특징이다. 선천적 [[구순구개열|구순열]] 때문에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입모양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하며 알아듣기가 매우 힘들다. 일종의 언어장애에서 비롯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후기에 그가 의사소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 [[구글]] 학술검색에서 하버마스의 [[http://scholar.google.co.kr/scholar?hl=ko&q=Habermas&btnG=&lr=|논문 인용횟수]]만 검색해 봐도 인용횟수 네자리수는 기본이고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무려 만 단위를 넘어버렸다. 철학계와 사회학계에서도 하버마스의 위상은 이미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석학 중 하나로 공인되고 있으며, 심지어 [[장수|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학문적 성과를 내는 것을 멈춘 것도 아니다. 2019년에 1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철학사책을 출판했다. * 하버마스는 1996년 4월27일에 한국을 방한한 적이 있다. 무려 15박 16일에 달하는 일정 동안 거의 쉬지않고 계속해서 세미나, 토론회, 강연회, 기자회견 등을 가졌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258779#home|#]] 그리고 언론연구원 주최 기자간담회에서 "정보를 선택, 조정하는 매스미디어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력이며 따라서 편집권과 경영권을 분리해 이 권력을 간접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위 편집진 선임문제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며 사주가 편집진 결정에 되도록 간여하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구의 68년 상황과 한국의 90년대가 비슷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서구의 68년 상황과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굳이 (백지에서 새로 시작하듯) 서구의 이념 논쟁에서 모델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이념틀을 찾을 필요가 있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985|#]]고 말하면서, "순수성을 지향하는 [[불교]]와 공동체 지향적인 [[유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현대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을 잊지않았다.[[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78|#]]--또한 서울대입구역 근처 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007.html|#]]-- * 1953년 24세의 하버마스는 나치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문제와 관련해 하이데거가 했던 이야기가 의심스럽다며 그 이유를 제시했다. 하버마스는 공식적으로 하이데거를 공격하면서 1935년 『형이상학입문』에서 사용한 국가사회주의의 "내적인 진리와 위대함"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이데거는 마르쿠제에게 국가사회주의의 승인은 1년 전에 중단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하이데거는 이 강연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어떤 해설도 부치지 않은 채 1953년에 재출간하도록 허락했단 말인가? 하버마스는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에서 "정말 혐오스러운 것은 나치의 철학자가 전쟁 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누구도 입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 집단 범죄의 결과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1] * 하버마스는 정상적인 학창시절 대신 군대조직에서 매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던 '대공부대 세대'로서, 십대시절 히틀러를 보호하는 일을 했다. 15세의 하버마스는 동시대 대부분 소년들처럼 히틀러소년대(Hitler Youth)의 구성원이었다. 참전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전시봉사를 면제 받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던 하버마스는 동맹국의 공습에 대항한 후방군의 작전에 대공부대 방어를 위해 동원되어 서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나중에 지역의 한 신학교 교장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나치의 '수동적 동조자'로 묘사했고 소년시절엔 아버지의 생각을 따랐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과정과 나치의 수용소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그와 가족이 누린 평온한 만족감을 떨쳐내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정치적 범죄의 체계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2] * 전쟁 후 하버마스는 본대학에 등록했고 이후 괴팅겐과 취리히에서 철학공부를 했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그는 하이데거를 연구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쓴 그의 편지에는 상징적 울림이 있었다. 젊은 지식인이 연장자이자 멘토였던 철학자에게 침묵 속에 숨지 말고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체제를 어떻게 찬양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새로운 독일세대는 이전 세대에게 앞으로 나서서 그들이 저질렀을 죄를 해명하고 회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2] * 1958년 5월에 28세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치적 시위에 참여했다. 연방공화국의 하원은 그 해 3월 독일의 군대가 나토(NATO)의 원자폭탄무기로 무장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연방공화국의 군대는 1955년부터 존재했고 출발부터 핵무기보유와 관련한 난감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원자핵 과학자들로 구성된 '괴팅겐 18인'이라는 이름의 한 시위단체는 당시 고려대상인 무기 중 하나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정도의 파괴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독일에 그런 무기를 들여올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특히 핵무기를 갖고 있던 군대의 위험에 대해 일부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세지고 있던 반감을 공유하지 않았다. 실제로 연구소의 젊은 회원들은 화를 냈다. 민주주의적 태도에 따라 군대지원자를 선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독일국방부의 연구를 이들이 거리낌 없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4반세기 동안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해온 호르크하이머가 특히 연방공화국과 지나치게 친밀한 동맹을 맺고 있는 점을 걱정했다. "그의 공적인 행동이나 연구소를 위한 정책으로 보건데 비판이론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회주의적 순응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쨌든 자신이 이 비판이론의 전통을 대표하고 있지 않은가." 하버마스는 한 학생잡지에 「소요는 시민의 첫 번째 의무」라는 헤드라인을 담은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스승인 아도르노의 진술을 불러내어 현대철학의 임무는 "저항 속에 그 생명의 핏줄을 얻는다"고 쓴다. 하버마스는 시위대가 "우리의 이름을 대변하면서 지배하려 드는 정치가들"에 대항하고 있으며, 핵무기로 무장할 군대에 관해서 국민투표를 하자고 요구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17~420] * 1957년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철학적 논쟁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유물론적 민주주의로, 자유민주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발전시키자"고 요구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요구가 하버마스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닐 것이라고 호르크하이머는 의심했다. 호르크하이머는 하버마스가 논문에서 애초에 표현한 혁명의 요구를 아도르노가 다듬어서 연구소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키려고 위에 인용된 표현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만일 그렇다면 이 편집된 원고는 연구소가 오랫동안 고수해온 이솝 우화적 언어와 같은 궤를 이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안심할 수 없었다. 어떤 독자라도 이 글에 담긴 혁명의 요구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어떻게 자유주의적 제도에 의해 부르주아사회의 족쇄에 묶여있는 국민이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위 정치적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H(하버마스)는 이 사회가 변혁을 위해 '충분히 숙성한 상태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호르크하이머는 아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사회변혁을 인정하는 발언을 연구소의 연구보고소에 실을 수는 없다네. 연구소는 이 족쇄를 채우는 사회가 주는 공공기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니까." 확실히 그렇다. 격한 혁명의 요구는 연구소가 독일국방부로부터 연구계약을 따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호르크하이머는 하버마스를 쫓아내려 했다. 그는 아도르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매우 영리한 핑계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적영역에 대한 박사 후 연구논문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그에게 3년 정도 걸릴 다른 연구를 먼저하라고 요구했다. 화가 난 하버마스는 사임하고 마르부르크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법학자인 볼프강 아벤드로스의 지도하에 논문을 마치러 떠난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20~421] * 아도르노가 설득해서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서, 1964년 호르크하이머의 은퇴 이후 연구소의 철학과 사회학 교수직을 넘겨받았다. * 1963년 『아도르노 기념논문집』에서 하버마스는 [[칼 포퍼|포퍼]]가 과학과 사회과학연구의 본성을 규정하는데 있어, 특히 사회적 불안정이 증가하고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지적 순진함을 보였다고 비난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변증법적' 비판이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보다 우월함을 주장했다. 그의 비난은 포퍼의 제자들을 자극해서 아도르노의 제자들을 비합리주의자이고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게 만들었다. * 1967년 6월 하노버에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루디 두치케와 한스-위르겐 크랄을 상대로 《대학과 민주주의: 저항의 조건과 조직》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연단에 선 하버마스는 학생들의 급진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지만, 그들의 방법은 문제 삼았다. 그는 두치케가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혁명을 꾀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내 견해로는 그는 1948년 유토피아 사회주의라 불렸던 주의(主意)론적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고 있찌만 오늘날의 상황은 좌파파시즘이라고 불러야 한다." [*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81] * 그는 1971년에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서 스탄베르크에 있는 《과학 기술의 세계에서 살아갈 조건을 연구하는 막스플랑크연구소》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단 곳의 공동대표가 된다. 스탄베르크는 뮌헨 근처의 작은 호숫가 마을이다. 하버마스는 이 과학기술 세계에서 1955년에 결혼한 부인 우테와 함께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다. 하버마스 부부는 이곳에서 3명의 아이를 길렀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04] *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을 청년시절에 읽었을 때 즉시 몰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 책에 담긴 내재적 비판이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국가의 등장으로 자기보존에 관심을 가진 주체들과 자체운용체계들에 적합한 목적론적 합리성의 제한된 지평 속으로 일체의 정당하고 유효한 질문들을 통합시키려는 경향이 확장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 지점에서 시도했던 수사학적 도약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목적론적 합리성의 명령들은 최근 생산한 제품들 ㅡ 현대과학, 정의와 도덕성의 보편주의적 개념들, 자율적인 예술 ㅡ 에 이성이 종속되어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과학에는 도구적 이성의 동원 이상 무엇인가가 있고, 예술은 문화산업 이상의 무엇이 있다. 헌법적 정부를 비롯해서 법과 도덕성의 보편주의적 토대들은 그저 비난 받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버마스에게 계몽은 '건전한 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은 이 핵을 가볍게 처리하고 지나가버렸다. " 『계몽의 변증법』은 객관적 폭력으로 변한 목적론적 합리성의 신화로부터 도피할 어떤 전망도 제시해주지 않았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게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듯이 모든 진실이 상대적이라면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조차도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에게 이 총체적 망상체계는 오직 선진산업사회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도래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하버마스는 이런 시각을 거부했다. 대신에 현존 체계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18세기 공공영역이라는 개념을 이 체계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저항하기 위해서 부활시킬 수 있었다. 도덕적 주체의 성숙함, 자기통제와 자율성 등 칸트가 칭송했던 자질들이 후기 자본주의라는 이 망상의 총제적 체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시대에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13~514] *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버마스의 관심권에 들지 못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저항적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체제적 변형태로서 하버마스가 근대성의 기획이라고 간주했던 것에 담긴 비판적 힘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성의 기획 없이는, 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적 자본주의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둘째,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경멸했다. 루디 두치케의 정치(하버마스가 좌파파시즘이라고 불렀던 것)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합리주의와 허무주의를 희롱하는 듯이 보였고, 따라서 나치시대를 상기시켰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14] * 하버마스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공공영역으로 작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은 고도로 파편화된 의사소통 회로의 반정부적인 전파를 풀어놓습니다. 이 전파는 부정기적으로 겹칩니다. 물론 무제한적인 의사소통의 자발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성격은 권위주의적 체제에서는 전복적 효과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웹 그 자체가 어떤 공공영역을 생산해내진 않습니다. 그 구조는 전문가들이 검토하고 걸러내 온 주제와 발언들에 관해서 동시에 의견을 형성하는 시민들로 구성된 분산된 공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20] * 하버마스가 독일 언론에 공적인 참여를 했던 일 중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역사가들의 논쟁》에 개입해서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 토론했던 것이다. 이 논쟁은 1986년부터 4년간 격렬하게 이어졌다. 독일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는 "아우슈비츠는 무엇보다 러시아혁명의 발발과 그 파괴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다. 소위 제3제국 동안 일어난 유대인 집단살인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왜곡된 복사본이지 원초적 행위이거나 고유한 원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놀테는 러시아의 수용소군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먼저 생겼고 독일은 볼셰비키의 위험에 직면해서 '합리적으로' 나치즘으로 선회한 것이라고 추론했다. 히틀러가 몰락한 뒤 40년이 흐른 뒤 놀테와 그 외 우파역사가들이 제3제국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로부터 독일의 책임을 면제받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것을 하버마스는 알아챘다. 설상가상 하버마스가 상대했던 역사가들의 일부는 서독의 수상 헬멋 콜의 기독민주당정부와 연결이 되어있던 지식인이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에 대한 이들의 수정주의적 설명은 하버마스에게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학술적 역사를 오용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의 목적은 필시 국내적으로 콜의 인기를 받쳐주고 서독이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지고 이스라엘에게 지불해 온 배상금의 중단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논쟁 상대들이 독일 역사를 정상화시켜서 놀테가 "사라지려 하지 않는 과거"라고 불렀던 것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한다고 묘사했다. 하버마스는 이들이 나치즘은 독일역사에서 소규모의 범죄 집단이 벌인 역사적 위반에 불과하다고 암시함으로써 독일 국가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시도한다고 주장했다. "아우슈비츠를 예외가 아닌 것으로 만들려는" 이런 시도를 공격하는 일련의 논문들을 쓰면서 하버마스는 "독일에 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 ㅡ 비록 아무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하지만 ㅡ 는 독일의 손으로 살해했던 이들의 고통을 왜곡 없이, 또 지적인 형태로 기억해주고 그 기억을 계속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썼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22] * 《역사 논쟁》에서 특히 그의 화를 돋운 것은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이었다. 그는 독일민족주의를 용인할 수 없었다. 민족주의는 하버마스에게 욕지기나게 했지만, 특히 독일민족주의는 최악이었다. 그는 민족국가, 특히 인종적 통일성에 기초한 국가의 배타성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정서적, 감정적, 감성적 결속을 통해 연대하고 있어서 의사소통적 이성에는 열려있지 못한 상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의사소통적 이성은 국가를 제재할 수 있기 때문에 공공영역이나 시민사회의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하버마스가 '체제'라고 부르는 것,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행정의 작용을 윤활하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인 시민들에게 지적인 도구와 사회적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적 감시를 담당하도록 준비시키기 보다는 단일한 정치공동체의 소속감을 부여한다. 더군다나 민족주의적 감정은 항상 정치적 엘리트들에 의해서 쉽게 조작된다. 히틀러가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감정의 조작이었고 하버마스가 역사의 반복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그가 쓴 글에서 하버마스는 담론 이전의 민족주의가 2차 세계대전 이래 독일의 발전과정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훼손시켰다고 했다. 그는 연방공화국이 자신이 '제헌적 애국주의'라고 부른 것을 위해서 민족주의를 거부했던 사실에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연방공화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제헌적 애국주의란 다른 무엇보다도 영원히 파시즘을 극복해가면서 정의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하고 상당히 자유로운 정치적 문화에 닻을 내리도록 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1990년 『혁명 따라잡기』에 썼다. 그의 희망은 제헌적 애국주의가 민족주의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제헌적 애국주의는 배타적이지 않았고 선이라는 단일한 개념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제헌적 애국주의는 국가의 자유롭고 공정한 작동방식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고 번창해가는 공공영역이나 시민사회가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정치체제 속에서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23~525] * 제헌적 애국주의는 대학교수보다는 시민들에게 덜 고무적이다. 세속적 이성은 '취약한 동기'라는 문제를 겪어왔다. 이 이성은 시민들이 덕을 실천하도록 이끌지 못했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그저 세속적 이성을 폐기 처분할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인식적 성취"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관용, 평등, 개인적 자유와 자유로운 사유, 사해동포주의와 과학적 진보 등은 근대성이 성취한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공적 생활에 있어서 종교가 담당하는 역할을 재고한다. 그러나 종교가 시민들에게 그러한 역할이 될 수 있으려면, 종교측에서는 '자연적' 이성의 권위를 제도화된 과학의 오류 가능한 결과들과 법과 도덕성에서 보편화된 평등주의의 기본원칙들로서 수용해야만 한다. 역으로 세속적 이성은 그 자체로 신앙의 진실에 관련된 판관노릇을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종교가 바뀔 준비가 된다면 종교의 영향력으로 시민들에게 제헌적 애국주의를 효과적으로 퍼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톨릭교회가 그의 계획에 포섭될 준비가 되어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34~535] [각주] [[분류:독일의 현대 철학자]][[분류:독일의 사회학자]][[분류:1929년 출생]][[분류:프랑크푸르트 학파]][[분류:뒤셀도르프 출신 인물]][[분류: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재직]][[분류: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재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